부제가 말해지지 않는 말들의 恨국어사전이다.
‘두 세계를 구성하는 두 언어가 있다’라는 제목으로 짧은 서문이 있다.
-언어는 거울이면서 거짓이다. 삶을 비추기도 하지만, 삶을 비틀기도 한다. 삶과 조응하기도 하지만, 삶을 조롱하기도 한다. 韓국어가 언어의 표준을 자임할 때, 표준에서 배제된 언어는 恨국어가 된다. 韓국이 국민의 표준을 지정할 때, 표준에 끼지 못한 사람은 恨국에 산다.
이 짧은 서문을 읽자마자 작가가 궁금해졌다. 이문영, 한겨레 기자라고 하는데 인터넷을 뒤져도 많은 정보가 나오지 않는다. 기자의 글이지만 감성적이면서도 힘이 있고 설득력이 강하다.
시인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책이라 말랑말랑한 시어에 관한 것인 줄 알았다. 아니다. 말해지지 않는,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언어에 대한 고발이다. 불편해서 외면하게 되는 사실들에 대한 이야기다.
나에게 가장 절실하게 와닿았던 이야기는
[최저보다 아래 한국] 외국인 노동자에 관한,
[나와 그대의 이야기 백골] 고독사에 관한...이건 거의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수리되지 않는 노동 서비스] 삼성전자 서비스 하청업체에 관한 사례들이다.
다른 사례들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최근에는 해고 노동자의 자살소식이나 노동자의 사고 소식은 언론에서 뜸하다. 최저시급이 올라 사는 형편이 좋아져서일까? 법규가 강화되어 사고가 줄었나? 그래서이면 다행이겠다. 어쨌든 최저시급이 올랐다고, 법규가 강화되었다고, 그래서 못살겠다고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는 사장님은 없는 것 같다.
[최저보다 아래 한국편]에서 인종차별과 편견에 대해서 속을 부글부글 끓이며 읽다가 갑자기 며칠 전에 본 축구 경기가 생각났다. 아스날과 애버튼의 프리미어리그 15라운드 – 애버튼의 고드프리에게 얼굴을 밟힌 아스날의 도미야스... 내 판단으로는 분명히 고의적인 행동이었는데, 심판은 레드도 옐로우도 주지 않았고, 아르테타는 자기 선수를 보호하지 않았다. 그건 인종차별에서 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치사한 프리미어리그다.
이 책은 사회과학서적이지만 심장에 꽂히는 절절한 글이 많다. 사실이 소설로 읽혀서 현실이 아닌 것처럼 순화되어 받아들여지는 사례가 있을 정도다.
나와 나와 나는 죽어서 썩어간 짧은 시간보다 살아서 견딘 긴 시간이 훨씬 외로웠다. 나와 나와 나는 고독사 이전에 고독생을 살았다. 살았을 때 이미 몸의 살이 모두 뜯기고 마음의 살이 모두 발라진 백골이었다. 삶은 오로지 산 자의 몫이었고, 죽음도 오로지 죽은 자의 몫이었다. 나와 너와 우리에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삶과 아무도 함께하지 않는 임종과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이 있을 뿐이었다. 나와 나와 나 가운데 당신은 없는가. 여기는 백골 세상이다.
내가 떨어지는 것도, 내가 살아 있는 것도, 나의 의지대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받는 자]가 [하는 자]를 움직였다.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를 움직였고, 수리받는 자가 수리하는 자를 움직였다. 나는 오르고 싶은 곳과 오르기 싫은 곳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들은 스스로를 변태시킨다. 바다로 들어간 고래는 지느러미를 얻고자 다리를 뗐고, 하늘을 잊은 타조는 날개를 접어 질주의 속도를 얻었다....생존을 위해선 퇴행하는 것도 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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