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 이야기/북수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 무라카미 하루키

by 그랑헤라 2017. 2. 3.


세계적으로, 우리 나라 역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작가 하루키의 소설을 처음으로 읽어 보았다. 읽지 않으면 트랜드에서 뒤처진다는 듯이 받아들여졌던 하루키 현상을 쫒아가고 싶지 않았고, 몇 장 읽어 보았을 때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내가 읽은 하루키의 책은 유럽에서의 생활을 편안하게 쓴 에세이 '먼 북소리' 뿐 이었다. 


상실의 시대, 처음부터 술술 잘 읽히는 책이다. 뭐지? 난 극단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란 쟝르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책은 분명 극단적인 삶이 있는데도 읽힌다. 이유가 뭐지?


먼저 일상에서 보여지는 것들이 섬세하게 그러나 담백하게 설명한다. 책을 읽다보면 그 장면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 나무 끝에 달린 잎들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고,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다른 세상의 입구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작고 희미한 울음소리였다. 그 밖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어떤 소리도 우리들의 귀에는 닿지 않는다. 누구 한 사람도 마주치질 않았다. 새빨간 새 두 마리가 초원 속에서 무엇인가에 겁을 먹을 듯이 날아올라, 잡목림 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다음은 글 중간에 나타나는 스타카토이다. 명사 보다는 부사나 접속사나 뭐 이런 중요해 보이지 않는 단어에 찍혀있는 스타카토는 문장을 맛깔나게 해 준다.

 - 날이 저물자 기숙사는 휑하니 마치 폐허처럼 느껴졌다. 


가장 중요한 점은 주인공인 와타나베의 사고가 나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3인칭 작가적 시점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나 본인 스스로는 매우 엄격하다. 그의 행동은 구질구질하지 않아서 좋다. 

또다른 인물들, 정신병원에 있는 나오코와 레이코는 자신의 본능을 억제하고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미도리, 나가사와 그리고 레이코에게 피아노를 배운 13살 여자아이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데 정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본능을 억제하고 살아가는 우리 현실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공간이 아닐까?


책을 읽다가 인상적인 구절들이 꽤 있다.

 -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게 서민이고, 착취를 당하고 있는 것도 서민이잖아. 서민이 알지 못하는 말이나 지껄이면서 뭐가 혁명이고, 무슨 놈의 사회 변혁을 하겠다는 거야. 

내가 전교조 모임에 나가봐서 느꼈던 점도 바로 이것이다. 적당히 그럴 듯한 말을 지껄이면서 우쭐해지는 것 같더라. 제법 명석한 나를 설득하지 못하는 그런 어려운 말을 누구에게 하란 말이야.


 - 노동과 노력의 차이는? 세상 사람들 모두 악착같이,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있는 것은 노력이 아니고 노동이다. 노력은 좀 더 주체적이고 목적을 가지고 하는 거다. 

난 노력고 노동의 차이가 어디 있는지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


 - "와타나베와 내가 닮은 점은, 타인이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라지 않는다는 거야. 그게 다른 녀석들과 다은 점이야. 다른 녀석들은 하나같이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안달하지.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고 와타나베도 그렇지 않아. 이해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나고,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일 뿐이라고." 

이 두 사람, 참 쿨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도 이 부류의 인간이다.


 - 이 책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 

기즈키, 나오코, 나오코 언니, 레이코, 하쓰미. 삶을 계속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주체적으로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말한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내재해 있는 것이다. 

나도 동감이다. 요즘 문득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떻게 삶을 의미있게 만들 것인지, 고민이 많다. 


하루키의 책을 읽다보면 속도가 느려질 수 밖에 없다. 영화와 음악 등 다방면으로 박식한 하루키의 글 속에는 많은 음악과 영화가 등장한다. 그러면 난 유튜브를 뒤져서 그 음악을 들어봐야 한다. 이 책 역시 제목 자체가 비틀즈의 노르웨이안 숲에서 차용했다. 당시의 젊은 세대들의 원색적인 욕망과 슬픈 상실의 갈등을 노래한 것이 그의 이야기와 맥락을 같이하기 때문이지.

또한 이 책은 그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유럽 남부에 살면서 완성한 소설이다. 먼 북소리를 쓰면서 이 책을 완성시켰다니 왠지 나도 거기에 함께 있었던 느낌이다.




'문화 이야기 > 북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들의 변호사 + 지연된 정의  (0) 2017.02.20
빌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0) 2017.02.16
백년을 살아보니-김형석  (0) 2017.01.22
백년의 고독  (0) 2017.01.15
어린 왕자  (0) 2017.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