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자 : 이윤석 - (전)연세대국문과 교수
출판사 : 한뼘책방
출판연도 : 2018년 11월 25일 [출판된지 얼마 안되었는데, 인터넷 서점에는 찾을 수 없다.]
꽤 오랫동안, 80년대에도 발표하고, 90년대에도 발표를 했으나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2018년도에 출판을 했는데 애석하게도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우리동네 도서관 독서회에서 전직 국어교사였던 분이 추천한 책이라서 알게 되었다.
책은 1부-허균이 홍길동전의 작가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말한다.
이 저자는 허균이 [홍길동전]의 작가가 아닌 이유를 몇 가지 이유를 들어서 단호하게 주장한다.
1.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을 통해 창작시기를 알 수 있다.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장길산은 1690년대부터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데, 허균은 1618년에 사망했다. 책에서는 선혜청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건 시기상으로는 맞는 듯하다. 선혜청은 1608년도에 설치되었단다.
2. '홍길동전'과 같은 형식의 한글소설은 1800년 무렵에 나타난다.
3. 허균은 소설가가 아니다. 한글로 소설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근거자료가 어디어도 없다.
그런데 왜 홍길동전의 작가가 허균이라고 알려졌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광해군과 인조 때에 살았던 이식의 택당집에 허균이 수호전을 모방하여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말이 나온단다. 그런데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한문일 것이며 그 원본조차 없다는 것이다. 택당집은 목판인쇄본이므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고, 모두들 허균의 홍길동전을 알고 있었을 것인데, 그러나 아무도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허균의 작품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균의 홍길동전은 한글소설 홍길동전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로 온 다카하시가 허균이 홍길동전의 작가라고 발표를 했단다. 그리로 다카하시의 제자 김태준은 공산주의사상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내용이며, 17세기에 이러한 개혁적인 작품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스승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2부에서는 한글 소설의 발생과 전개에 대해서 설명하고 3부에는 원본에 가깝게 엮은 [홍길동전]을 첨부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내가 아는 홍길동전의 전부이다. 학창시절에 배우기는 했다.
주제는 적서차별의 타파, 사회개혁, 이상국 건설이라고 외우기는 했고, 문제에 나오면 틀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한 번도 [홍길동전]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완전히 현대판으로 개작된 신동우의 만화 홍길동은 몇 장 본 기억이 있기는 하다.
홍길동전을 읽은 후에는 주제가 적서차별의 타파와 사회개혁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홍길동이 세운? 아니 뺏은 율도국도 개혁적인 사회는 아니었고, 홍길동 역시 3명의 부인을 두었다는 것이다.
홍길동전에는 전투장면이 몇 번 나온다. 그런데 늘 전술이 똑같다, 벤투감독처럼. 그런데 '거짓패하여 달아나니....'를 사용하니 좀 치사하기까지 하다.
작가는 홍길동전의 주제 찾기에 힘쓰기 보다는 흥미위주의 읽을거리로 생각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홍길동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몇 가지 제안을 한다. 이 부분은 독서모임을 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실질적인 부분이다.
1. 길동이 출생과 아버지의 성적 욕망
2.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힘과 지혜를 시험받는 대목에서 해인사의 재물을 빼앗는데, 왜 굳이 사찰이었야 했을까?
또 뭐가 더 있었는데 까먹었다.
이 책을 읽다보니 몇 권의 책이 연상되었다.
1. 초정리편지. 한글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보급이 되었는가에 대한 아동용 소설이다.
2, 성균관 스캔들 - 조선시대의 세책집과 한글소설이 어떻게 독자를 갖게되었는가와 연관이 된다.
3. 태백산맥은 없다. - 현재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해 학문적으로 반론을 제시하는 것이 같다. 그런데 기존의 벽이 너무 두꺼워서 계란으로 바위치기 정도밖에 못하고 있다. 난 태백산맥보다는 산경도로 산맥을 보아야한다는 의견에 적극 동의하며, 이 저자의 주장, 홍길동전의 작가는 허균이 아니다라는 것에도 매우 공감한다.
마지막으로 교육현장에서 문학을 지도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개선할 점이 많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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