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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야기/북수다

저주토끼_ 정보라

by 그랑헤라 2023. 7. 30.

작가의 말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운 방식을 통해서,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혼자 제각각 고군분투하는 쓸슬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조그만 희망이다. 

 

저주토끼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에게  저주토끼를 안겨줘야해.

 

머리

말을 마치고 젊은 그녀는 늙은 그녀에게 다가섰다. 젊고 억센 손이 늙은 어깨와 목을 붙잡았다. 젊은 그녀는 늙은 머리를 변기 속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재빨리 늙은 발목을 잡아 들어 올렸다. 늙은 몸을 가볍게 변기 속에 거꾸로 처넣고 나서 젊은 그녀는 변기의 뚜껑을 닫고 물을 내렸다. 

 

차가운 손가락

갑자기 발밑의 땅이 물컹, 해졌다. 그녀는 중심을 읽고 넘어졌다. 허우적거리다가 간신이 몸을 일으켰을 때, 환한 빛이 눈앞을 뒤덮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돌연한 불빛 앞에서 기능을 멈춰 버렸다. 그녀는 쏟아지는 빛 속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정면에서 다가오는, 다가온다기보다 통제력을 잃고 도로를 벗어나 날아오는 차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 공포에 질려 굳어버린 자신의 표정이 한순간 또렷하게 보였다. 무기력한 운전대를 꼭 움켜쥔 자신의 양손 사이에 또 다른 다섯 개의 손가락이 비웃듯이 여유롭게 얹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어둠이 덮쳤다. 

 

몸하다

그녀는 천천히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려 초점 없는 눈으로 남자의 당황한 얼굴을 쳐다보아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힘겹게 고개를 돌려, 바닥으로 뚝뚝 흘러 떨어지고 있는, 한때 그녀의 아기였던 피 웅덩이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문득 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흐느끼다가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서럽게 엉엉 소리 내 울었다. 그러나 그것이 안도의 눈물인지, 아이를 잃은 슬픔인지 혹은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안녕, 내 사랑

- 인공 반려자는 2년이나 3년, 길어도 4년이 지나면 폐기됩니다. 아직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혹은 부품 몇 개만, 소프트웨어 몇 가지만 업그레이드해주면 십 년은 더 쓸 수 있는데, 단지 새로운 기종이 나왔다는 이유로 쓰레기 취급을 받습니다. 그 새로운 기종도 결국 2, 3년이 지나면 또 쓰레기가 되고 말입니다.

- 나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당신에게만은 대체할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이고 싶었습니다.

셋이 동시에 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세스의 손이 1호의 목덜미를 잡고 데릭이 1호의 허리를 잡은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셋이 전원과 중앙처리장치를 연결해 쓰고 있다. 그래서 맛이 가버렸던 1호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

저런 게 가능할 줄은 몰랐다. 아니 물론 가능한 건 알고 있었지만, 수리나 실험을 통해 공학자가 실험실에서 일부러 연결해놓은 모습이 아니라 기계가 스스로 자기들끼리 연결한 모습을 처음 보았다. 

가능과 불가능을 따지자면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불가능했다. 로봇이 인간을 칼로 찌르다니, 자신을 폐기 처분하려 했다는 이유로.

 

아내는 처음에 자신이 본 것이 무슨 광경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헛가 바닥에 누워서 부들부들 떠는 딸의 다리를 아들이 바짝 달라붙어 핥아대고, 그 뒤에서는 남자가 아들의 등 뒤에 다가앉아 조그만 접시를 대고 있었다. 아내는 멍하니 서 있다가 딸이 흐느끼며 "엄마..."하고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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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어머니는 딸을 지키지 위해 저항했다. 남자는 딸을 빼앗기 위해 덤벼들었다. 딸은 아빠와 엄마가 몸싸움을 하는 가운데에 껴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 남자가 아내의 팔에서 딸을 억지로 떼어냈다. 아내는 그 서슬에 떠밀려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리고 뒤로 쓰러지면서 오래전 여우의 발목에 끼어 있던 덫에 뒷머리를 부딪쳤다. 

 

흉터

그는 절망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복수가 아니었다. 최소한 이런 복수는 원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마은 전체가 '그것'의 존재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었다. 

합당한 결말이라 해도, 그는 밀려오는 상실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알지도 못하는 타인들의 주술과 환상과 잘못된 믿음에 빼앗겨 버린 어린 시절, 매일이 생사의 기로였으나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어져 버린 그때의 오랜 고통과 절망을 애도하며 그는 폐허가 된 마을에 멈추어 서서 울었다. 

그리고 마침내 눈물이 멈추었을 때, 세상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그는 해가 뜨는 쪽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즐거운 나의 집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저주는 풀 수 있으나 자신의 욕심에 스스로 눈먼 인간을 눈 뜨게 할 방법은 없다. 

 

재회

나는 그가 의미 있다고 여기는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명료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의 생명, 혹은 앞으로의 삶이 경각에 달렸다는 절박한 위기감과 거대한 공포,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죽일 수 있지만 살릴 수도 있는 한 사람이 있다면 모든 생존본능이 그 한 사람을 만족시키는 데 쏠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커다란 외상을 겪어 일단 세상을 이렇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그 뒤에는 이런 관점을 극복하기 쉽지 않다.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내 부모가 자식의 삶을 파괴하고 미래를 갉아먹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무리하게 확장시키려고 애쓰는 것도 이러한 강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키워주었으니 감사하라는 말 앞에는, '죽이거나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아마 그들에게는 진심일 것이다. 내 부모와 그들의 부모 세대, 한국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세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이 아니라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생존이기 때문이다. 

이해와 용서는 전혀 다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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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에게 삶이란 거대한 충격과 명료한 생존본능이 동시에 찬란하게 떠오른 과거의 어느 시간에 갇힌 채, 유일하게 의미 있었던 그 순간에 했듯이 자신이 살아 았음을 되풀이해 확인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 순간은 짧지만,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생존을 그저 무의미하게 반복해서 확인하는 동안 좋은 시간도 나쁜 시간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삶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과거에 고정되어버린 사람들, 그도, 그의 할아버지도, 그의 어머니도, 나도, 살아 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사실은 모두 과거의 유령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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