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촐한 지휘자 소개 좀 봐라. ㅎㅎ 이름 석 자면 충분하다는 거지. 하늘을 찌르는 자신감, 멋지다.
아래 세 줄의 약력도 없앴으면 더 멋졌을텐데....
보관하고 싶은 공연 리플렛은 이게 처음이다. 형식적인 해설이 아니라, 지휘자의 연주 의도를 보여주는 글이다. 그래서 공연이 훨씬 이해가 쉬웠다.
오늘, 구자범은 만프레드였다.
"나는 누구 것입니까?"
인류의 역사를 보면, 나의 주인이 나 자신이란 걸 깨달았다고 고백한 지는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아직도 그리 많지 않다.
깨달은 바이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만프레드를 통해서 묻는다.
"내 삶은 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죽음은 누구 것입니까?'
공연 팜플렛에 구자범이 쓴 글이다. 큰 힘을 가진 자 앞에서, 그것이 신일지라도, 당당하게 아니오를 말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바이런의 만프레드에 차이콥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감정이입이 된 것처럼 보였다.
러시아 5인조의 중심 인물인 발라키레프는 차이콥스키에게 만프레드를 작곡할 것을 권유했고, 형식과 조성까지도 구체적으로 지시했지만,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해석대로 무겁고 장중한 1악장, 빠르게 활기찬 2악장, 느리고 전원풍인 3악장, 정신없고 변화무쌍한 4악장으로 작곡했다. 차이콥스키도 만프레드의 의견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타인의 지시를 받는 느낌이어서 그 의견을 따르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 ㅎㅎ
오늘 구자범의 연주는 발라키레프의 견해와 같이 바이런의 시 '만프레드'의 이야기에 어울리도록 2,3악장을 바꿔서 연주했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번역한 해설 그래서 현재 우리의 상황을 반영하는 해설을 음악에 맞춰 모니터에 띄웠다. 우리는 교향곡이 아닌 음악극을 한 편 본 느낌이었다. 이토록 창의적인 해석을 하다니, 역시 구자범이다. 아무리 먼 길을 달려가도 그 보상을 충분히 해준다.
대전시향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있는 오캐스트라이지만 실제 공연을 보면 연주에서 열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난한 연주를 하지만 감동이 느껴지지 않아서 최근 몇 년 동안은 대전시향 공연을 가지 않았었다. 오늘 구자범이라는 캡틴의 지휘를 따르는 대전시향은 열정적이었다. 지휘자의 손끝을 따라 오캐스트라 전 단원들이 하나로 움직였다. 1악장의 무겁지만 날카로운 마무리에 무의식적으로 박수를 친 사람들을 이해한다. 충분히 그럴만한 연주였다.
1부에 생상스 첼로협주곡을 첼리스트 양성원의 협연으로 연주되었고, 무대에 있는 두 대의 하프를 야무지게 활용한 앵콜곡 동물의 사육제 중에서 백조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만프레드를 들은 후 첼로협주곡은 완전히 잊혀졌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도로가 짧아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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