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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국내여행

[제주] 버스타고 제주 여행 2일 : 어리목-윗새오름-영실

by 그랑헤라 2018. 3. 29.

어제, 일기예보에서 미세먼지에다 중국발 황사가 있을거라고 했다. 새벽에, 마이애미 오픈에 참여하고 있는 정현과 이스너의 경기를 보는 내내 한라산엘 올라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갈등이 되었다. 다행히 날이 밝자 생각보다는 맑은 하늘이었다.


등산 스틱을 가져왔으니 사용해봐야겠지? 

아침에 부랴부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어리목에서 올라가고 영실로 내려오는 것이 좋단다. 어리목과 영실을 갈 수 있는 1100도로를 지나다니는 240번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가 있었다. 



곽지모물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기 100m 전, 202번 버스가 지나갔다.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최소 15분은 기다려야 했다. 한참을 기다렸다가 버스를 탔고, 맨 뒤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이제 이 코스는 익숙해졌나보다. 

버스는 9시 24분에 버스터미널에 도착했고, 난 불안에 떨면서 오던 것과는 달리 어리목행 9시 30분 버스를 여유있게 탈 수 있었다. 좀 작은, 매우 낡아서 시끄러운 버스는 30분 정도를 달린 후에 휑한 도로에 예닐곱 명의 사람들을 쏟아냈다. 



이 곳이 처음이고 또 등산에 대한 마음을 다잡으며 기록을 남기려고 어리버리하게 서성였다.



그 사이에 나와 함께 내렸던 사람들은 분주하게 나무로 만들어진 트레일을 따라 올라갔다.



탐방로 입구까지는 10분 정도를 올라가야했다. 양 옆으로 원시림처럼 보이는 숲이 아직은 겨울 느낌이었다.



어리목 탐방로 입구는 관광버스 몇 대와 승용차들이 있었고, 사람들이 많았지만 워낙 넓은 곳이라 그렇게 북적이지는 않았다.

"윗새오름까지 일반인들은 3시간 걸려요. 영실로 내려갈 때도 한 시간 반, 그리고 영실입구에서 버스정류장까지 40분 정도 걸리니까, 넉넉히 6시간은 예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버스는 5시 30분입니다."

탐방로 안내소에서 지도를 받고 설명을 들었다.



자, 드디어 시작이다.



이 다리를 건널때 까지는 알지 못했다. 내 앞에 어떤 고난이 있을지...



얼마 올라가지 않아서 나타난 해발고도 표지석, 1000m이다. 내가 1100도로를 타고 왔는데, 100m는 어디로 간거야? 영실쪽이 1100에서 시작인가?



처음엔 완만한 계단이 나오는가 했더니, 곧 경사가 급한 계단으로 변했다.



급한 계단을 밟아서 계속 올라가는 중에 해발고도 표지석은 수시로 나타났다. 1100m,


  

1200m,



계단은 여전히 급했고, 난 100계단을 오르고 잠시 숨 고르기를 하면서 올라갔다. 3시간 안에 올라가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온전히 쉬지도 못했다.



헐, 눈이다. 곧 4월인데도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여기 저기 보였다. 




300m 정도를 계속 갈등하면서 올랐다. 중간에 외국인 여자 세명은 오르기를 포기하고 도로 내려갔고, 부인이 아래에서 기다린다는 아저씨도 되돌아 내려갔다. 아, 나도 갈등이다. 



눈이 제법 많아졌다. 등산로의 곳곳에 눈이 쌓여있었다. 그런데 물기가 많은 눈이고, 난 스틱을 가지고 있어서 미끄러지지 않고 잘 나갔다.



고도 1400m가 넘어서 조금 더 올라가자 드디어!!! 거의 평지처럼 보이는 길이 나타났다.



여기부터는 그리 힘들지 않고 올라갈 수 있단다.




등산로 옆에는 모노레일이 있다. 윗새오름에 짐을 실어나르는 것이라고 했는데, 구조용으로 더 유용하겠다.



1400m 정도부터 함께 올라온 중년부부와 함께 잠시 쉬려고 앉았더니, 까마귀 한 마리가 주변을 맴돌았다.  그 부인이 빵을 꺼내자 달라는 듯이 그릉그릉 소리를 냈고 작은 조각을 던져 주자 얼른 받아먹고는 또 기다렸다. 까마귀는 세 조각을 받아 먹고, 우리가 가방을 챙기기 시작하자, 이제는 관심이 없다는 듯 낮게 활강하며 날았갔다.

영리한 녀석.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것은 이 등산코스를 두고 한 말이 분명하다. ㅎㅎ



안내판에 의하면 이 곳 탐방로에서 사제비 동산까지 1시간, 여기에서 윗새오름까지 1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걸린 시간은 1시간 30분, 안내소에서 알려주던 그 사람이 한 말이 딱 맞았나 보다.

"이제 다 온거예요. 여기부터는 힘들지 않고 금방 갈 수 있어요. 한 시간도 안 걸려요,"

서귀포에 산다는 그 부부는 시종일관 여유있게 걸으면서 시간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충분히 여유있단다.



길은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트레일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이 얼마나 편한 등산길인가! 좀 전에 올라오던 숨이 넘어갈 듯한 계단은 벌써 잊었다.



전망도 끝내준다. 아기자기했던 다랑쉬오름의 전망과는 또 다르다. 이 곳의 오름들은 규모가 다 크다.






등산로를 따라서 이렇게 붉은 깃발이 꽂혀있다. 이건 겨울 등반을 위한 것이란다.

겨울에 이 곳에는 사람 키 만큼의 눈이 쌓이고 그러면 등산로가 사라지고 구분이 없어진단다. 그 때에는 저 빨간 깃발을 따라가는 거란다.



한라산이다!!! 물론 내가 한라산을 올라가고 있지만, 한라산하면 백록담을 담고 있는 저 분화구만을 생각하게 된다.



위로 올라갈수록 눈이 많았다. 이 곳은 겨울인지 봄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니, 넓게 펼쳐진 평화로운 구릉지처럼 보였다. 아름답다.



드디어 윗새오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올라왔다.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들이 있어서 더 북적였다. 지금은 힘들어도 수학여행 생각하면 한라산 등반이 가장 인상적인 기억이리라.



같이 올라온 그 분들이 남벽분기점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 보란다. 거기에서 보는 정산의 모습이 훨씬 멋지단다. 그래서 조금만 올라가 보기로 했다. 



그 쪽으로는 눈이 아직 많았다. 해발고도 표지석도 눈이 묻혀버렸다.




이 곳은 완전히 눈길이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눈이 쌓인 등산길을 10분 정도 걸었나? 아주 작은 개울을 지나면서 다시 나무트레일이 시작이다. 분화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쉼보르스카의 충분하다가 생각났다. 나도 여기면 충분하다.

다른 사람들은 저 숲 너머까지 다녀오는데, 난 나무 트레인이 끝나는 계단에 자리를 잡았다. 어제 저녁에 애월에 있는 빵집에서 산 미니 햄벅샌드위치와 숙소에서 만들어 온 커피를 한라산 정상을 바라보며 여유있게 먹었다.



시야를 45도만 왼쪽으로 돌리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다시 내려온 윗새오름에는 이제 등산통제를 하고 있었다. 내가 시간까지 잘 맞춰서 올라갔던 것이다.



자, 이제 영실쪽으로 내려가는 거다.




저 까마득한 위에 전망대가 있으나, 난 과감하게 지나쳤다. 지금까지 충분히 멋졌고, 저 위에 가봐야 별다른 것도 없을거야하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한라산엔 유난히 까마귀가 많다. 그래서 곳곳에 까마귀 조각이 있기도 하다.



또한 중간 중간에 이런 볼썽사나운 물건들이 있다. 화재를 대비한 방화수를 준비해 놓고 있는 것이란다. 그 쓰임을 알고 보니 볼썽사나움이란 생각이 없어졌다.



숲길로 들어서는 시간이다. 이 곳에는 어리목과 달리 유난히 주목이 많다.




까마귀 한 마리가 나의 하산을 배웅해 주고, 저 멀리서 한라산 정상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영실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탁 트인 전망을 보면서 내려온다. 이 전망을 뒤로하고 올라가는 길은 엄청 힘들겠다.



탁트인 전망을 마주하니, 완전히 죽어있던 내 비행 감각이 스멀스멀 살아나는 것 같았다.




이 영실 탐방로도 올라올 때는 장난이 아니게 힘들겠다.





내려오는 길 중간에 고양이 한 마리가 누워서 갸르릉거리고 있었다. 아주 약한 소리로..

집고양이면 누가 여기다 놓고 갔는지, 야생이면 왜 사람들을 피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혹시 아픈 것은 아닐까? 고양이 주변의 계단 지지대 위에는 까마귀 네 마리가 앉아있었다. 그 까마귀들은 고양이의 죽음을 기다리는가?



거의 마지막 부분인가보다. 급하던 계단도 끝나고 다시 숲으로 들어왔다.



위로 올려다보니, 내가 내려다 보았던 오백나한들이 이번에는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드디어 영실 휴게소 주차장이 보였다.



4시 넘어서 하산해서 5시 30분 버스를 탈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내려와 보니 2시 55분. 빨리 내려가면 3시 30분 버스를 탈 수 있단다. 내가 거의 산악인 수준으로 등산을 했단 말인가???  탐방로 안내소에서는 시간을 충분하게 두고 안내를 하는 것 같다.


굳이 일찍 내려갈 필요가 없으니, 나의 장한 등산을 기념하기로 했다. 휴게소에서 맥주 한 캔을 사서 시원하게 마시며 스스로를 격려했다. 음, 장하다.




휴게소에서 버스정류장까지는 30-40분이 걸린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길을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내려왔다.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드려요?" 승합차를 타고 내려오던 젊은 남자가 물었다.

"예, 감사합니다." 덮석 올라탔다. 

조금 더 내려오니 나보다 훨씬 일찍 출발했던 그 서귀포 부부가 또 다른 일행을 만들어서 내려가고 있었다. 그 분들은 거의 다왔다면서 승차하지 않았다.

"제주로 가신다고요? 그럼 죄송한데 제주 시내 아무데서나 내려주실 수 있으세요?" 

그렇게 난 그 남자의 차를 얻어타고, 시종일관 수다를 떨면서 제주까지 내려왔다. 



그 남자는 202번 버스가 멈추는 전통5일장 정류장에다 나를 내려주었다. 

"참, 요즘 제주에서 혼자 여행하는 여자들에게 사고가 좀 생긴다고 했었지?" 차에서 내린 후에 횡단보도 앞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의가 좋은 사람들인데, 한 두 건의 사건이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한다.





오는 길에 애월고등학교에서 내렸다. 오가면서 보니 벚꽃이 흐드러진 진입로가 무척 아름다웠었고, 한 번쯤은 내려보고 싶었었다. 그게 바로 오늘이다.




역시,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이런 이벤트도 제공하고 있었다.



다시 버스를 탔고, 이번에는 한담에서 내렸다. 한담에서 곽지까지는 해변올레길을 따라 다시 걷기로 했다.

한담은 무슨 드마라인가 영화로 유명해진 곳이란다. 그래서 지금은 엄청난 카페와 음식점이 있고, 관광객도 많이 온단다. 




많은 개발이 이루어진 마을.....내가 보기엔 이미 예쁜 마을이 아니다.






일몰이 가장 아름다울 것 같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영실 휴게소에서 산 귤을 꺼냈다. 내가 귤을 살펴보지도 않고 산 이유는, 제주도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난 이틀 동안 귤을 구경도 못해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귤, 내 인생에서 가장 맛없는 귤이었다. 그냥 물이라고 생각하고 먹었다.




흐린 공기 때문인지, 해는 바다에 닿기도 한참 전에 사라져버렸고, 그래서 멋진 일몰은 아쉽게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