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트리올에서 뉴욕이 멀지 않으니 US오픈이나 가볼까?'
엄청 무계획적인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미국방문비자도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 보니 ATP투어 로져스컵 테니스대회가 있단다. 로져스컵 대회는 남녀 경기가 토론토와 몬트리올에서 나누어서 치루는데 올해는 몬트리올에서 남자 경기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앗싸!!! 계획 없는 사람에게는 행운이 따르는 법!!! 모든 것이 새로우니까. ㅎㅎ
8월 4일 금요일.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고 난 가산을 탕진하는 중이다. 뭐, 뉴욕을 가기로 했다가 그만두게 되었으니 비용 문제야 완전 껌값이다. 그래서 맥주도 사마시고, 비싼 샌드위치도 사먹고 그러고 있다.
경기장은 4개이다. 센터코트, 내셔널뱅크 코트 그리고 아주 작은 5번, 9번 코트에서 경기가 진행된다. 일류선수들은 1라운드를 그냥 통과이고 시합도 센터코트에서만 한다. 그 다음 선수들이 내셔널뱅크코트를 사용하고, 더 순위가 낮은 선수나 관심이 덜한 복식 경기는 주로 5번, 9번 코트에서 열린다.
여기 운영이 꽤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
센터코트는 3층 스탠딩석까지 티켓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내셔널뱅크 코트는 1층 좌석만 티켓이 필요하다. 이 티켓은 3만 5천원 정도? 부터 시작하는데, 좌석 위치와 라인에 따라서 조금씩 가격 차이가 난다. 하지만 내셔널뱅크 코트 2층 관람석과 5번, 9번 코트는 입장권( 2만 7천원 정도?)만으로도 마음껏 관람할 수 있다.
내셔널뱅크 코트 2층 좌석은 매우 훌륭하다. 선수들과 가깝기도 하고 자리만 잘 골라앉으면 로열석이다. 5번, 9번 코트는 그냥 동네 코트장에서 구경하는 기분을 낼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관람할 수 있다. 물론 2층 뒷자리도 있지만...
경기를 진행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수고를 한다. 뭐라고 부르나? 선수들 옆에서 돕는 어린 학생들을.... 어쨌거나 그 어린 학생들과 나이가 든 자봉들은 관중을 관리하고, 젊은 자봉들은 바나 스낵코너 등등 힘쓰는 일을 주로 한다. 자봉들의 유니폼이 엄청 예뻐서 사고 싶을 정도다.
테니스과 관심을 끊은지가 오래되어서 사실 어떤 선수들이 유명한지, 탑 랭킹엔 누가 있는지 모른다. 4인방 중에서 나달과 페더러는 참가를 했으나 조코비치와 머레이는 참가하지 않았다. 나달과 정현이 모두 있으니 나야 뭐 아쉬울 게 없다.
코트 밖의 모습도 유쾌하다. 바나 까페테리아나 뭐 이런 곳에는 기본으로 20분 정도는 줄을 서야 한다. 아이들을 위한 몇 가지 운동 시설이 있고, 테니스용품 판매점은 한 동만 깔끔하게 있고, 티켓만 있으면 요거트도 공짜로 준다. 이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 중에 티켓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한 번 밖에 못먹었다. 첫 날은 몰라서, 세쨋날은 나달을 본다고 흥분해서, 네쨋날에는 맥주 사먹느라고 잊었다.
대형 화면에서는 센터코트의 경기를 실시간으로 상영해주고 있다.
선수들의 연습코트도 함께 있어서 누구든지 연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난 우연히 페더러의 연습 후에 그 쪽으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와우, 경기장 안 보다도 더 뜨거운 열기다. 난 페더러보다 앞에 있는 빛나는 젊은이에게 더 관심이 가는데....
혹시나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목표물 발견. 저 구석에 있는 코트에서 외롭게 연습을 하고 있는 정현 선수. 30분을 기다렸다가 나오는 정현 선수를 붙잡고 사진 한 장 건졌다. ㅋㅋ 가문의 영광이지.
다른 곳의 티켓 판매는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여기는 누구의 경기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티켓을 구입해야 한다. 완전 볼불복.
하지만 팬패키지 티켓이 있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의 첫 경기 티켓을 구입하는 거다. 일반 가격보다 꽤 비싸다. 난 나달의 팬패키지 티켓을 샀는데, 홈페이지 설명에는 분명히 사진 찍기도 있었는데, 직접가서 보니 그렇지 않단다. 다른 사람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걸 보니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나보다. 어쨌건 너무 비싼 티켓을 구입했는데도 경기를 싱겁게 끝나서 많이 아쉽다.
자, 이제 우리의 정현 선수의 경기에 대해 살펴보자.
정현 선수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래 되지 않았다. 내가 엄청나게 오랫동안 테니스에 관심이 없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테니스 경기를 중계하지 않으며, 우리 집은 텔레비젼이 없기 때문에 간간히 인터넷을 통해서만 몇 번 보았을 뿐이다.
처음에 홈페이지를 살펴볼 때에는 정현 선수 이름이 없었다. 초청받지 못했다는 의미? 그런데 월요일 1라운드 경기를 보려고 인터넷에 들어갔더니 정현 선수의 이름도 있었고, 주말에 예선 경기를 통과했단다. 그걸 몰랐네.
1라운드 경기의 상대는 랭킹 28위인 스페인의 로페즈선수다. 썩어도 준치(테니스광인 대학동기의 표현) 라는 로페즈 선수와는 점수로만 보자면 아슬아슬하게 이겼으나, 실제 경기는 좀 여유가 있었다. 진 두번째 세트 빼고는 늘 한 두 점이 앞서 갔으니까...
정현 선수는 코트에서 훨씬 눈부시다. 코트를 꽉 채우는 느낌이 든다. 랭킹이 높은 다른 선수들도 그렇지 않던데. 나달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를 조금은 가지고 있다.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이면 그 아우라가 더 커질 듯....
로페즈 선수는 참 별로였다. 게임이 잘 안풀린다고 코트에서 어찌나 중얼거리는지...혼자서도 중얼중얼, 관중석에 앉은 누군가에게도 중얼중얼... "Callate!"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관중의 90%는 로페즈 선수를 응원했다. 9%는 그저 구경을 나왔을 뿐이고, 꼴랑 1%만이 정현 선수를 응원한 것 같다. 스페인 사람들은 틈나는대로 'Vamos, Feli!"를 외쳐대는데 정현 선수가 좀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았다.
"잘 한다 정현!"을 외쳐주었다. 헐, 그런데 내가 외칠 때마다 점수를 잃었다. 입을 꼭 다물어야지.
정현 선수가 이기기는 했으나, 사실 경기는 재미없었다.
그라운드 스트로크는 제법 괜찮은 것 같은데, 발리나 네트플레이에서는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서브도 약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탈은 강한 것 같다. 표정의 변화가 얼굴에 보이지 않고, 실점을 해도 어떤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시합이 끝나고 마지막 한 사람에게까지 살뜰하게 싸인을 해 주고 코트를 떠났다. 난 다음 날 연습을 하고 나오는 정현 선수와 사진을 찍었는데, 과묵하고 진지함이 온 몸을 굳게 만들 정도이다. 유머 감각까지 있으면 최고인데.
2라운드 경기도 내셔널 뱅크 코트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앞의 경기가 너무도 지연되는 바람에 폼 안나는 9번 코트에서 열렸다. 나달의 경기 관람을 마치고 내셔널 뱅크 코트에서 기다리다가 느낌이 이상하여서 내려가 살펴보니 코트가 바뀌어 있었고, 이미 경기가 시작되었다.
이번 상대를 랭킹 13위의 벨기에 선수 고핀. 난 처음보는 선수다. 외모로는 영 운동선수 보다는 회사원이나 연기파 배우 같은데 엄청 잘하는 선수란다.
그러나 정현 선수가 더 당당했고, 집중을 잘했다. 반면에 고핀 선수는 실수를 많이 했다. 어렵지 않게 2세트로 경기를 마무리 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발리는 정말 못한다. 자신감이 확 떨어지는게 테니스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자, 가자, 가자!'를 열심히 외쳐주었다.
"참 좋은 선수다." 옆에 있던 멕시코계 캐나다 사진작가가 덕담 한 마디 해 주면서 계속해서 정현의 사진을 찍었다. ㅎㅎ 좋은 아저씨다.
역시 오늘도 친절하게 사인과 셀카를 충분히 찍어주고 떠났다.
3라운드 경기는 다시 내셔널뱅크 코트이다. 티켓이 매진이라서 더이상은 구입할 수 없다. 하지만 입장권만 구입해도 내셔널뱅크 코트는 2층 관람석에는 자유롭게 올라가서 볼 수 있다. 크지 않은 코트라서 2층 관람석도 훌륭하다. 난 일찌감치 올라가서 젤 앞 딱 중간에 자리를 잡았다.
드디어 정현 선수와 상대 선수 등장!!!
상대선수는 정현과 비슷한 랭킹의 프랑스의 만나리노이다. 하지만 랭킹 10위를 꺾고 올라온 무서운 선수다. 서브로 날카롭고 경기 운영도 노련했다. 처음부터 이기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팍 왔다.
결국 졌다. 6:3, 6:3으로. 점수로만 보면 일방적으로 당한 경기 같지만, 오우 노!! 절대 그렇지 않았다.
지난 이틀 동안의 경기보다도 훨씬 의미있는 경기였다고 본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지만, 정현 선수는 이번 라운드에서 꽤나 과감한 시도를 했다. 늘 자신없어하는 발리를 여러 번 시도했고(결국 거의 다 실패!!! 본인도 잘 알겠지?), 1,2 라운드에서 볼 수 없었던 코너로 찔러넣는 스크로크를 자주 시도했다. 몇 개는 성공하고 몇 개는 실패했지만, 정현 선수에게 필요한, 극복해야 할 문제이리라.
경기를 보면서 계속 든 생각인데, 정현이 이번 경기는 승부와 관계없이 해 보고 싶은 것을 과감하게 시도해 보는 것 같았다. 어제까지의 두 경기는 매우 안정적이고 자신있는 평범한 스크로크만 구사했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더 좋아 보였다.
경기 태도도 훌륭했다. 전 게임에서 미국 선수는 게임이 풀리지 않자 공을 저 멀리 코트 밖으로 날려보냈기도 하고, 마지만 한 게임은 서브 리시브를 제대로 하지 않고 경기를 마무리 했다. 어째 미국 선수들의 소양은 다 그모양인지... 그 옛날 로딕도 성질이 지랄이더만.
반면에 정현 선수는 이미 다 진 게임이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더 멋졌다.
아직은 어리고 가능성이 더 많은 선수. 점점 발전하리가 생각하고 3년 후에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된다.
(헐? 그런데 정현도 군대 가야 하겠지? 테니스병으로 불려 가서 똥별들 딱가리하면 어떻게 하지?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하면 면제인가?)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군대는 면제라고 함, 한 달만 훈련 받으면 된다고 인터네에서 봄.......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떠나는 정현 선수의 표정이 무척 어둡다. 뭐 이 상황에서 웃는다면 그게 정신나간 놈이지. ㅋㅋ
다음 투어는 신씨내티 투어란다. 갑자기 가고 싶어지네.
'여행 이야기 > 캐나다(2017)'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캐나다에서 기차 타보기 (몬트리올-핼리팩스) (0) | 2017.09.06 |
---|---|
밴프(BANFF)에서의 나흘 (0) | 2017.08.23 |
몬트리올에서의 먹는 문제 (0) | 2017.08.05 |
[몬트리올 근교] 쌩뜨 안느 드 벨르뷰 Saint-Anne-De -Bellevue (0) | 2017.08.05 |
[몬트리올] 야경 포인트 (0) | 2017.07.29 |